사진 · 그림

황숙희 - 거리의 벽화를 보다

MissJaneMarple 2007. 3. 31. 03:25

 

황숙희는 거리를 걷다 문득 벽에 그려진 그림, 벽화를 보았다. 도시를 걷는다는 것은 도시의 몸을 탐색하고 접속하는 일이자 이른바 보행명상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놓고 능동적 형식의 명상에 빠져드는 일이자 그 몸으로 온전히 사는 일이다.

 

사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 여기저기를 탐험하고 다니는 공간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도시의 외관과 신체들 사이를 흘러 다니면서 특히 그 피부에 붙은 이미지를 주의 깊게 보았다. 특정한 장소와 목적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벽화를 통해 우리 시대의 공공미술을 생각해보고 벽화의 의미와 역할을 새삼 떠올려 본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호기심, 일상을 통한 관찰, 사진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이미지에 대한 사유가 혼재된 일이다. 그러니까 벽에 그려진 그림과 시각적 장치들을 통해 공간과 이미지, 권력과 장소 등에 대한 여러 생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한 것인데 그에 따라 이 도시의 벽화가 작가에게 탐험하는 즐거움과 성찰하는 경건함을 동시에 전해준 매개가 된 셈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도시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상 변화한다.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고 낡은 건물이 지워지는가 하면 리모델링이 반복된다. 그에 따라 건물의 외벽이 수시로 다른 이미지로 대체되고 위장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무척 흥미롭다.
기능만으로는 사람을 담아낼 수 없다는 인식에 따라 도시를 꾸미고 그 속에서 놀고 쉴 수 있게 가꾸는가 하면 사람들의 시선에 호소하는 이미지로 잔뜩 장식되어 있다. 그러한 꾸밈은 더러 획일성과 몰개성, 천박성을 보여주는가 하면 자본과 체제 이데올로기 및 특정 공간과 장소에 대한 선전하는 등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이미지의 여러 모습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작가는 서울과 경기도를 비롯해 전국 이곳 저것을 돌아다니면서 건물의 외벽에 그려진 벽화이미지들만을 채집해왔다. 도시풍경을 찍은 사진 속에 우연히 잡힌 벽화들은 많이 보았지만 벽화 그 자체만을 일종의 다큐멘터리로 찍은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벽화가 단지 찍혀졌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좀 아쉽다. 반면 공간과 지나는 행인, 그리고 또 다른 것과의 연관 속에서 좀 더 풍부한 의미로, 예기치 않는 그 무엇으로 발화되어 나가면서 읽혀지는 지점이 있었으면 한다. 작가에 의하면 1970,80년대 벽의 모습은 대부분 회색과 가림 막 일변도였지만 90년대를 지나면서 다양한 이미지들이 스며들고 이는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으로 확대되어나갔다고 한다. 그런 벽화를 보다가 그 벽들이 적극적인 광고의 역할을 하며 각각의 장소에 따라 특정한 이미지가 재현되고 있음을 관찰했다.

예를 들어 관공서의 벽화는 대부분 전통적인 이미지, 민화풍의 그림을 통해 정체성과 보수성을 드러내고 있고 초등학교의 방음벽에는 주로 이발소 그림 풍으로 그려지는 김홍도의 서당그림 등 교육과 훈육, 전통가치의 내재화를 암시하는 이미지들이 대부분이다. 공해를 내뿜는 공장의 굴뚝에는 청명한 푸른색으로 구름이나 자연풍경이 그려지고 삭막한 도시 한 가운데 있는 벽화들은 평화로운 농촌풍경을 끌어들이며 길가에 위치한 벽들은 가짜 가로수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반면 대안적인 벽화들은 꿈과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통해 이 도시의 무거움과 삭막함, 자본과 관능으로 물든 선전이미지들을 순간 희화화, 경량화 시켜 버리는 경우도 있다.

황숙희의 벽화는 그 모든 것들을 담담히 담았다. 이 벽화사진들을 보다보면 오늘날에도 이 벽화들은 이미지의 주술성과 욕망의 도상화를 여전히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이 벽화는 기존의 미술이 지닌 폐쇄성이나 한정성을 훌쩍 벗어나 있는 열린 미술이자 탈전시장 미술이고 그만큼 공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소중한 이미지들이다. 그러니까 순수미술이 미학이 요청하는 미를 창작해낸다면 공공미술에 해당하는 이 벽화는 미학 바깥인 일상과 사회 속에서 삶의 미디어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으로 무한히 열려있다고 볼 수 있다.

 

공공미술의 하나인 벽화는 이 세상에 딱 하나만 있는 삶의 현장이다. 공간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현장성에 대한 강조는 장소가 곧 작품의 의미와 형식의 주요 속성이 되는 ‘장소 특정미술’(site-specific art)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벽화야말로 그 장소 특정미술에 매우 적합한 예일 것이다. 장소와 공간에 개입하고 이를 변화시키는 벽화는 우리들 삶의 터에 고유한 화제나 문제를 만들고 사람들의 눈에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아니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이 공공미술에 해당하는 벽화는 예술 자체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창의적으로 봉사하면서 기존의 삶의 공간을 반성하게 한다. 그러니까 공공미술은 미학만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삶 속에 개입하는 일상적 존재다.

순수미술이 미술관 안, 미학 내에 사는 텍스트라면 공공미술인 벽화는 미술과 일상, 미학과 세상 사이에서 관계 만들기로 사는 콘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일상에서 만나는 벽화이미지는 보는 즐거움 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보는 이들에게 이미지 교육을 행한다. 문득 일상이 공간, 비근하고 지루한 삶의 정경에 예술 같은 삶을 선물처럼 전해준다. 이 벽화는 또한 일종의 ‘사회적 초상’으로써 기존 공간에 균열을 일으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사람과 사건, 공간의 상호 관계적 역할을 엮어낸다. (글 : 박영택 / 미술평론, 경기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