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

숭례문 7

MissJaneMarple 2008. 2. 27. 03:35

 

숭례문 앞 모습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직 성벽이 그대로 있네요. 

앞에 까만 옷을 입고 무리지어 있는 사람들은 신부님들이 아닐까 싶어요.

 

경술국치(1910년) 직전의 모습.

봉영奉迎이라는 글자 사이에 일본 황실 문장인 국화문양이 선명하다.

 

성벽이 사라졌습니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모습이 조선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남대문시장 개장, 1900년>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입니다.

오른쪽 가게는 옷과 이불 등을 파는 가게인 듯하고 왼쪽은 米 라는 글씨를 보니 쌀가게인가 봅니다.

 

일제는 조선물산공진회 행사를 준비하면서 남대문을 선전탑처럼 사용하였습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제가 조선점령의 성과를 자랑하고자 한 일종의 박람회(Expo) 입니다.)

 

전차가 다니네요. 바로 윗 사진에는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데, 

숭례문 입구 양 옆으로 일본식 조형물을 세워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물산공진회

1910년 강점을 전후하여 일제는 이른바 시정개선사업施政改善事業을 시작할 때 '신정新政'과
'진보進步'를 기치로 내세웠고 지식인들은 이런 사업에 자발적으로 적극 동조하는 것을 역사적
임무로 여겼다. 1915년 9월 일제가 시정 5주년 기념 사업으로 대대적으로 벌인 조선물산공진회가
대표적인 예요 안국선安國善이 소설집 {공진회共進會}를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은 것이 이것이다.
일제는 조선통치의 정당성을 내외에 홍보하기 위해 1915년 9월 10일부터 11월 30일까지 80여 일간에
걸쳐 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때를 맞추어 가정박람회, 조선철도 천마일 기념식, 전국기자대회, 전국교육가대회 등을
열어 이러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개최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금회의 공진회는 총독정치 개시 이래로 5년간에 있었던 조선산업의 진보 발달을 보이고

이로 말미암아 바깥으로는 조선의 산업을 소개하고 안으로는 금후의 개량진보를 장려할 것이다." 

 

(이 글은 http://cafe.daum.net/nicecafe312/GzNb/679 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