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그림

논語

MissJaneMarple 2007. 3. 26. 15:40


<작업노트>

‘논語’

점점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나의 기억 너머 저편에는 봄 햇살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나의 ‘논’이 존재한다. 새참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던 내 할머니의 그날은 그 뒤를 졸레졸레 따르는 어린 아이가 메아리소리에 장단 맞춰 연신 홍알홍알 노래를 불러대고 있다. 그렇게 그 아이에게 논의 메아리는 거대한 바다의 파도 소리 같은 존재였다.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기라도 하는 날, 논두렁은 온통 질퍽했지만 아이에게는 싱그러운 여름날의 숲길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열하는 태양사이로 벼꽃이 한참이나 익어갔고 멀리서 퍼져오는 탈곡기 소리가 멈출 때 쯤 이면 아이의 논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는다. 흰눈이 소복이 쌓이던 날 아침에는 조반도 마다한 채 일찌감치 썰매를 가지고 달음박질 했다.

어느새 그 아이는 사라지고 논 앞에 누구인가 서성이고 있다.
마치 나의 삶을 지속시켜주기라도 하는 듯 다가왔던 어린시절의 ‘논’은 정착하지 못하는 삶 가운데서 늘 잊지 않고 머릿속에 함께 움직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보일 듯 말 듯 묻혀져가는 무채색의 저 풍경위에 나는 나의 ‘논’을 붙잡아 두려 한다. 그것이 어떠하든 아무런 답을 요구하지 않은 채, 다만 그것을 위해 내가 살고 있노라고 속삭여 주고 싶다.



글, 사진 : 양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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