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글읽기

활엽수림에서 / 황지우

MissJaneMarple 2007. 2. 27. 14:05

 

1971년 : 4월 대통령 선거. 5월에 재수하러 상경. 광화문
뒷골목에 진치고 날마다 탁구나 당구 치다.

1972년 : 대학 입학, 청량리 일대에서 하숙. 그해 여름, 어
느날, 혼자, 몰래, 588에서 동정을 털고 약먹다. 약값을 친
구들한테 뜯기도 하고 새 책을 팔기도 하다. 가을, 국회 의
사당 앞, 탱크가 진주하고 학교 문 닫다. 새 헌법 선포되다.
추운 다다미방에서 겨울 내내 신음하다. 독毒이 전신에 번지는
꿈에서 화다닥 깨어나기도 하고, 가끔 인천 방면으로 나가
서해 갯벌에서 고은시집高銀詩集 읽다.

1973년 : 둥숭동 개나리꽃 소주병에 꽂고 우리의 위도緯度 위
로 봄이 후딱 지나간 것을 추도하다. 가정교사 때려치우다.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다. 여자를 만났다 헤어지고, 그때
홍표, 성복이, 석희, 도연이, 정환이, 철이, 형준이, 성인이
와 놀다. 그들과 함께, 스메타나, '몰다우江' 쏟아지는 학림學林
다방, 木계단에 오줌을 갈기거나, 지나가는 버스 세워놓고
욕지거리, 감자먹이기 등 발광發狂을 한다. 발정기發精期, 그 긴 여름
이 가다. 어디선가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나고, 어디선가 바
람이 다가오는 듯, 예감이 공기를 인 마로니에, 은행나무 숲
위로 새들이 먼저 아우성치며 파닥거리다. 그때 生을 어떤
사건, 어떤 우연, 어떤 소음에 떠맡기다. 그 활엽수 아래로
生이, 그 개 같은 生이, 최루탄과 화염병이 강림하던 순간,
그 계절의 성城 떠나다. 친구들 '아침 이슬' '애국가' 부르며
차에 올라타다. 황금빛 잎들이 마저 평지에 지다.

1974년 : 홍표, 권행이, 오걸이, 종구, 해찬이, 내가 부르
는 이름들 끝에 10년, 12년, 세월의 긴 꼬리표 달리다. 논산
훈련소 저지대에 엎드려, 황토에 얼굴 묻고 흐느끼다. 땅에
고해성사苦解聖事하다. 그리고 따블빽 하나와 군번 하나로 미지의 임
지를 향해 北上하다. 한탄강, 北韓 38度線, 야산, 트럭 뒤
먼지가 그리는 작전도로, 공공 사단, 세모 연대, 네모 대대,
가위표 중대, 당구장표 소대, 말단 소총수 되다. 어린 소대장
구두 닦고, 탄약고 제초 작업, 비온 뒤 도로 보수 공사, 낫
질 삽질, 임진강서 모래 채취, 담뿌차 타고 씀밧골서 흙파고
중대 뒷산 호박 구덩에 똥푸고, 쎄멘 공구리 등에 지고 군자
산 방카 공사, 식기 닦고 빨래하고......살다. 그냥 비인칭 주
어로 살다. 이따금 서울서 여자가 면회오고 그녀가 준 돈으
로 동두천서 지친 성기性器와 잠을 자기도 한다. 미군 캠프 부근
을 하릴없이 서성이다 흑인 병사에 팔뚝으로 크게 말좃을
그려 보이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오푸 늦게 귀대하다. 녹색
이 서서히 갈색으로 옮겨가는 군자산, 갈색이 다시 회灰색으로
내려오는 산협山峽, 으로 몰려오는 첫눈, 맞으며 첫 휴가 나오다.
(아, 환속하다) "그 세상이, 먼저 건드렸어, 우리를." 우리들
중에 한 사람이 말하다.  "아냐, 세상을 저질러 버렸어, 우
리가." 우리들 중의 또 한 사람이 말한다. 그날 영화 '빠삐
용'보고 말없이 헤어진다. 生을 탕진한 죄, 아무도 말 못
한다.

1975년 : 다시, 도연이 정환이 들어가다. 철이 석희한테 그
런 편지 오다. 아직 '아무데도' 못 간 그들에게 면죄부 띄우
다. "너희는 살아 남아라. 날마다 새로 태어나라." 8월 부
친 사망, 관보받다. 그날 수첩에 '또 한 사람 하역荷役'이라고
쓰다. 그해 겨울 GOP 철책으로 들어가다. 저쪽의 가장 따
뜻한 쪽을 맞댄 이쪽의 가장 추운 경계에서 겨울 지내다. 새
벽 기슭에 서서 부은 눈으로 눈 덮인 산을 멩하게, 바라보다.

1976년 : 제대. 해군서 제대한 성복이와, 그해 가을, 신림
동서 술마시며 죽치다. [귀소歸巢의 새] 쓰다.

1977년 : 다섯 번째로 만나 여자와 결혼하다. '무작정 살
다.' 6개월 후 이 표류에 한 사람 더 동승하다. 딸 낳다.
그때 도연이 출감하다. 정환이, 해일이 출감하고 곹 동부전
선으로 가다. [文學과知性] 겨울호에 성복이 '시인'으로 혼
자 떨어져 나가고 석희, 군대에서 음毒 자살 기도하다.

1978년 : "날 먼저 죽이고 나가라, 이놈아." 어머니 울면
서 말리다. 親동생 끝내 광화문으로 나가다. 통대 99%지지,
같은 사람을 9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다. 홍표 나와서 컴퓨터
회사 취직하다. 출판사에, 수입 오퍼상에, 섬유 수출업에,
하나씩 둘씩 들어가다. 더러 결혼도 하고 그런 때나 가끔 서
로 얼굴 보다. 生, 지리멸렬해지다. 그 生의 먼 데서 여공들
해고되고 한 달에 한 번 대구로, 김해로 동생 면회가서 옷
과 책 넣어 주다.

1979년 : 대통령 죽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멀리서, 모
두, 한꺼번에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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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는 그의 시에 한자를 잘 사용합니다.
그게 그의 시에서는 잘 어울립니다.
옮기면서 한자 앞에 한글을 넣었습니다. (예 : 고은시집高銀詩集 읽다)
단, '석희, 군대에서 음毒 자살 기도하다'는 시집에 있는 그대로 쓴 것입니다.
음독이라고 쓰거나 飮毒이라고 하지 않고 음毒이라고 한 것이 짐작할 수 없는
시인의 의도인지 어쩌다 그리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독이 전신에 번지는 꿈/ 예감의 공기를 인 마로니에/ 생을 어떤 사건, 어떤 우연, 어떤 소음에 맡기다/

그 개 같은 生/ 땅에 고해성사하다/ 살다. 그냥 비인칭 주어로 살다/ 그세상을 저질러 버렸어, 우리가/ 生을 탕진한 죄, 아무도 말 못한다/ 너희는 살아 남아라. 날마다 새로 태어나라/ 生, 지리멸렬해지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멀리서, 모두, 한꺼번에 돌아오다.

저도 오랫만에 이 시를 읽었습니다.
학림다방.....
이젠 대학로에 가도 학림다방에 마음과 눈이 가지 않습니다.
학림이 아직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엔 여전히 예감을 품은 바람이 불까요?
그런 바람이 불어도 제가 느끼지 못하는 거겠죠.

제일 마지막 구절을 읽을 때, 언제나 울컥했습니다.
여전히 그 구절은 그렇군요. - 05·02·21 13:40